자랑스런 가문 자손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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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런 가문 자손의 책임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순흥안씨는 시조공이 삼형제를 두셨고 그 삼형제분의 자손들이 면면히 흐르는 역사 속에서 오직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글이나 유적하나 하나를 살펴볼 때마다 위대하셨던 선조들의 유덕(遺德)을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우리 순흥안씨가 6대성 중의 한 성으로 끼게 된 까닭도 알게 되었고 글자 그대로 삼한갑족의 현벌(顯閥)의 거성(巨姓)가문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가문을 유가의 종가적 입장에서 학자와 선비의 가문이며, 충효절의(忠孝節義) 여민동락(與民同樂)으로 일관한 청렴한 가문이며 ,숭조목족(崇祖睦族)으로 더욱 발전하고 번성하는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손 된 우리들은 보다 높은 긍지(矜持) 속에서 자손 된 도리와 책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1. 유가의 종가로서의 가문

 

시조공의 4세인 문성공 안향 선조께서 원나라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손수 필사하여 가지고 오심으로서 이 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을 처음으로 도입 하셨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고 또 장학제도를 마련하여 백성을 교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따라서 문성공 선조는 동방성현 18인중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 되셨고 우리나라의 도학지조(道學之祖)가 되셨으며,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에 처음으로 배향 되셨다. 이 소수서원에는 문정공 안축 선조와 문경공 안보 선조도 추배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문성공의 학문을 계승한데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조의 태종은 안문성공이 학문을 일으키고 학교를 설립한 것은 백대의 왕들이 본받을 만 한 것이고, 그리고 영조는 회헌 선생은 백세(百世)의 종사(宗師)요, 해동(海東)의 부자(夫子)라고 말했고, 고종께서는 문성공은 학문과 도덕이 백세의 유종이라 하였으며, 주세붕 선생은 문성공을 동방도학지조(東方道學之祖)라고 했고, 이퇴계 선생 역시 백세의 유종(儒宗)이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선조를 모신 우리 순흥안씨는 가히 유가의 종가(宗家)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 도덕의 실천을 주장한 공자로부터 주자에 이르는 유학의 정통을 동방에 있게 한 가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고려조가 불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삼았다면 조선은 유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유교를 정치의 이념으로 삼게 된 것은 바로 문성공을 비롯한 우리 선조 들이 유학을 크게 진흥시킨 데서 비롯됐다고도 보겠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유파의 종가자손답게 문성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상생활에서는 인륜과 도덕을 생각하면서 부모에게는 마땅히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예의바른 생활로 가정을 다스리며, 항상 수신제가(修身齊家)하며, 믿음으로서 벗을 사귀고 모든 처사에 삼가고 참되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가 유가의 종가임을 말해주는 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에 관한 글을 옮겨 본다.

 “성균관은 우리나라 유학의 총본산이요, 대학의 뿌리다. 일제 때 이곳에 명륜학원이란 유학원을 두었는데 이 학원 이름이 연유가 되어 1936년 명륜동이라는 동명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성균관이 있다하여 관동(館洞)으로 불렀다. 지금 명륜동 1~2가 그리고 성균관이 자리 잡고 있는 3가 일대의 통칭이다. 이 관동을 관(館)사람 마을이라고 했는데 성균관의 각종 제사를 맡아보는 사람들이 주로 산다고 해서 얻은 별칭이다. 그 관사람들이 예외 없이 고려 때 굴지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노비들 후손이라 하여 안씨노비촌(安氏奴婢村) 이라고도 불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한양에 천도하자 태조는 정치이념으로 삼은 유교를 기리는 뜻에서 무엇보다도 앞서 공자를 비롯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육현(六賢)을 모시는 성균관을 이곳에 지었다. 태조 6년의 일이다. 고려시대의 유맥(儒脈)을 이었던 안향의 후손들도 한양으로 이사를 했고 성균관이 이룩되자 그 순흥안씨 가문에서 거느리던 1백여 명의 노비들을 이 성균관에 바쳐 제사 일을 돌보게 했던 것이다. 관동(館洞)에 살면서 번창하여 한때 이들은 1천여 명에 이르렀으며 관동은 대대로 물리는 순흥안씨 노비문서 없이는 들어 살 수 없을 지경이었다. 비록 노비 신분이지만 성현을 모시는 지엄한 일을 한다하여 긍지도 대단하여 시골 양반은 종이라 하여 “해라” 못하고 “하게”, “하오” 하는 존댓말을 써야했다. 한 시골에서 올라온 성균관선비들의 거의가 이 관(館)사람들 집에 기숙하였기로 이 학생들이 대과에 급제 역대의 조정을 주름 잡았는지라 연줄도 있고 해서 위세도 대단했다. 어느 집은 역대 정승판서 몇을 하숙시켰느니, 당상을 몇 십 명을 배출했느니 하여 명예로 삼았으며 또 그 명예로 하숙비를 올려 받기도 했던 것이다.

 

옛날에도 도의에 어긋난 정치를 하면 이 성균관 서생들이 글 읽던 자리를 걷고 왕궁문앞에 나아가 집단 데모를 곧잘 했는데 이를 자리를 걷는다 하여 권당(捲堂)이라 했다. 도의정치를 부르짖던 선비의 우상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서생들이 일제히 권당하고 경북궁문을 뚫고 들어가 시위를 했는데 이때 오라에 목을 엮인 서생들이 옥을 채우고 종각 다락까지 채웠으며 이 갇힌 하숙생의 밥을 나르느라 관동 노비촌이 텅텅 비었다 했다.

 

이 관동노비를 구심(求心)시키는 행사가 바로 그들 조상의 상전인 안향(安珦)의 제사이다. 바로 9월 12일이 상전 제삿날이면 각기 쌀과 베를 추렴하고 성균관에서도 돈과 쌀을 보조하여 성대하게 제를 지냈으며, 이날 영남,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멀리서 참여했으니 대단한 대동제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는 제사정치를 했다 할 만큼 크고 작은 제사가 많았다. 그 제사의 제수 장만이며, 진행이 모든 치다꺼리를 제례에 투철한 관동노비들에게 담당시켰다. 제사 때마다 신명에게 올리는 희생물인 짐승 잡는 일도 이 관동의 노비촌에 주어진 특혜였다. 제사에는 신과 공식(共食)하는 뜻에서 희생된 짐승으로 국을 끊여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음으로서 신인일체(神人一體)를 다지는 절차가 따르게 마련이다. 농사신인 선농(先農)에게 풍년을 빌며 바친 소의 희생음식이 선농탕(先農湯)이다. 이 선농탕을 직접 끊인 것도 관동 노비들이었다. 이 제사 음식을 여염을 상대로 팔기 시작한 것도 관동노비들이었다. 곧 선농탕의 원조는 관동이며 한말까지만 해도 선농탕은 관동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특수음식이었다. 한말 갑오개혁으로 노비가 해방되기 전 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이어 내린 순흥안씨 가문의 노비가 적잖이 살았으며 이 관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그들의 솜씨인 선농탕이 특수음식에서 보통음식으로 보편화 돼 갔던 것이다. <1991. 5. 15자 조선일보 12면> 참으로 흥미 있는 내용이다.

 

 

 2. 학자와 선비의 가문

 

예로부터 세분의 왕비가 나온 가문은 한분의 정승이 나온 가문만 못하고 ,세분의 정승이 나온 가문은 한분의 선생이 나온 가문만 못하다(三王妃不如一政丞, 三政丞不如一先生)는 말이 전해 내려왔다.

 

우리 순흥안씨야 말로 문성공 안향 선생 선조이래 계속 대를 이어 문자(文字)시호를 받은 선조 들이 줄을 이어 모두 심오한 학문과 높은 도덕으로 우리 가문을 삼한의 갑족이며, 6대성의 하나로 올려놓은 것이다. 10대 이상을 계속해서 한대도 거르지 않고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하는가 하면, 3대를 내려 부원군(府院君) 그리고 5대를 내려 대제학을 하심으로서 삼수훈봉(三受勳封) 오전문형 (五典文衡)의 보기 드문 명문가로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하여 유가의 대표적인 가문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학자의 집안이면서, 선비의 가문이라고 할 수 가있다.

 

우리나라에서 선비의 기풍이 확립된 것은 문성공 선조께서 성리학을 들여온 후 유학이 진흥되고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면서부터 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선비정신의 근본은 문성공, 문정공, 문경공 그리고 퇴계 이황 선생 등 유학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겠다.

 

선비정신의 근저는 우선 입지(立志)에 있다고 본다. 즉, 뜻을 바르게 세우고, 그 바르게 세운 뜻을 굽혀서,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선비는 인간의 가치기준을 재(才)보다는 덕(德)에 두었다. 그러니까 선비는 학덕을 갖춘 하나의 인격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의 처신은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소중히 여기고 바로 그대로 실천해야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를 생각하며 거동하고,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옳길 때에는 의에 합당한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청빈을 자랑으로 삼으며 불의에 항거하고 죽을지언정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염치(廉恥)를 아는 선비인 것이다.

 

안중근의사의 유필에 “견위수명 견득사의(見危授命 見得思義)” 가 있다. 즉, 선비는 위급을 당하면 목숨을 바치며, 이로움을 보면 의(義)를 먼저 생각하라 하는 것이다.

안의사가 옥중에서 일본인들의 유혹을 받았지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선비정신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손들은 학자와 선비의 가문이라는 점에서 자기 자신이 항상 배움에 힘써야 하고 또한 자손들을 가르키는데 남달리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언제나 선비다운 행동으로 결코 남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아는 선비의 정신으로 더욱 수신제가(修身齋家)에 힘써야 할 것이다.

 

 

 3. 충효절의의 가문

 

유교의 근본은 말할 것도 없이 충(忠)과 효(孝)인 것이다. 유가의 종가(宗家)로 자처 할 수 있는 우리 순흥안씨가문은 타의 어느 가문에 못지않게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 왔고 또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선조님 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기술한바 있지만 주세붕 선생은 우리 가문을 충효우제 청풍지풍(忠孝友悌 淸風之風)의 가문이라고 했다. 우리 가문에서는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하여 충신 55분 그리고 시호 또는 봉군을 받은 분이 30여분이나 되고, 항일투쟁에 있어서도 애국지사로 안중근의사, 안창호 선생 등 수백 명에 달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충절의 표본인 선조 몇 분의 행적을 알아보기로 한다.

 

시조공의 8세이신 문충공 안우(安祐)는 고려때 안주군민만호부의 도만호로 있을 때 4만에 달하는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서경(西京)까지 적의 손에 들어갈 위급한 상태에서 죽기로 싸워 적을 물리치고 큰공을 세움으로서 추충절의정란공신 오성군으로 봉해지고 중서평장정사를 제수 받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또 20만의 대군을 몰아 쳐들어오니 또 죽기로 싸워 이를 물리치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평소에 공의 전공을 시기하던 역신 김용들에게 전승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문에 들어서자마자 무참히도 피살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후에 나라에서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조선조에 와서 이태조는 숭의전(崇義殿-고려 태종 등을 모신 사당)을 짓고 고려충신으로 복지겸(卜智謙), 홍유(洪儒),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倍), 정몽주(鄭夢周) 등 16인을 배향게 하였으니 고려 500년 동안의 충신 16명중 우리 문충공 안우 선조가 들어 있으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다음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이순신 장군을 대리하기도 하고 또 늘 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전함 위에서 장렬한 전사를 한 충현공(安弘國)에 대하여 대제학 강현(姜峴) 선생이 쓴 시장(諡狀) 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공의 훌륭하신 충절을 알아보기로 한다.

 

 “계미년에 공은 두 형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때 임금님이 피난길에 올랐을 때에는 선전관으로 용만(龍灣)까지 모실 때 조정신하가 모두 24명뿐이었다. 왜적의 세력이 뒤쫓아 와서 황해도와 평안도를 휩쓸려고 할 때 덕흥군과 임해군이 뿔뿔이 헤어져서 피난길로 함경도 영흥 땅에 멈췄다. 이 때 임금의 뜻을 전할 길이 막히자 공이 자원하여 적진을 무릎 쓰고 부왕의 소식을 전하고 복명을 수행하였고 당시 삼남길이 막혀 생사를 모를 때에 공은 또 다시 자원 선발되어 두루 군진을 돌아다니면서 왕의 명령을 선포한 뒤 미쳐 복명을 하기도 전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주(喪主)노릇을 하던 중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오심과 동시에 원종 1등 공신으로 뽑히고 다음해 계사년(1593년) 봄에 상복 바람으로 도총부 도사가 되었다가 급한 특별 명령으로 평안도 희천군수로 나갔으나 부임 3개월 만에 사직하고 상청(喪廳)에 돌아와 이해 겨울 상중에 있는데도 전라도 보성군수로 발탁이 되었다.

 

때마침 큰 흉년이 겹쳐서 굶주리는 백성이 서로 바라만 보고 있을 때 공의 두 형제는 자신들이 빈핍함에도 공은 곡간 채 실어 보내어 터럭만한 남김이 없었다. 부임해서도 친구들의 배고픔에 관곡을 나눠서 살려낸 목숨이 대단히 많아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와 화목 하는 행동의 천성을 보였고, 백성은 은혜로 관리는 법으로 다스리니 통제사 이순신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워져서 혹은 장군을 대리하기도하고 혹은 선봉장이 되어서 여러 차례의 공격과 수비의 성공은 공의 탁월한 계책에 말미암은 바가 참으로 많았다.

 

원균이 후임으로 이순신 자리에 앉았어도 그의 신임은 여전하여 마침내 중군장이 되어 군무를 도맡아 함으로 장병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아 신뢰를 받던 중 정유년(1597년) 왜적이 다시 침공해 옴에 원균 통제사가 수군장병에게 “적이 침공하는 길목에 숨었다가 적군이 오자마자 습격하라” 하였으나 해변의 고을 사람들은 왜적의 공포심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공만은 평소에 준비한 병사와 병기를 완비한데다 군령을 받은 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은 안채에 들지도 않고 처자를 만날 틈도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나서 즉각 배를 띄워 빠르게 통영에 도착하니 관하 각 진의 제장들은 하나도 시간에 도착하지를 못했고 6월 19일 적이 안골포를 점령하자 통제사 명령으로 중군장이 되어 전선 30여 척을 거느리고 막 바로 적의 소굴을 뒤엎으려 적과 맞붙어 포(砲)와 활을 콩 볶듯이 쏘아 공격의 세력을 크게 떨치니 적은 드디어 위축되어 진지를 버리고 달아났다. 적선이 다시 가덕진을 침범함으로 공이 보유한 모든 선박을 몰아 다시 공격하니 적은 드디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지라 공이 명령을 내려 배를 돌려 역습으로 맞불질을 하는 순간 각 수군들이 다 물러서면서 그들이 도리어 공에게 “우리는 수가 적고 적은 수가 많으니 공이시어 잠시 물러섰다가 기회를 보아서 다시 공격 하시오” 하거늘 공은 “어림없다. 우리의 적이 6년을 서로 싸워 이길 듯하다가도 못 이겨왔는데 적을 보고 물러서는 것은 결코 승부가 날 날이 없으리라 더구나 통제사의 응원병력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눈으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 아니 구할까보냐? 너희들은 큰마음으로 죽고 살길을 겁내지 말라.” 이렇게 외치고 위급 깃발을 휘둘러 구원을 청해 봐도 반응이 없자 공이 안 될 줄 깨닫고 아군에 소리치며 “나라사랑함이 오늘에야 뚜렷해지도다. 저들이 돌보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하겠다(平生爲國之心 正左今日 從彼不救我 我敢不以死報)” 하며 드디어 몸을 일으켜 갑판에 나가니 적은 이어 한 겹을 에워쌌다. 공은 분신혈전(奮身血戰)하면서 활을 쏘고 칼을 막아 똑 바로 적선에 부딪치니 적의 병졸들이 후퇴하는지라 드디어 승전의 기세로 추격 할수록 분노는 더욱 치밀어서 죽음을 잊고 우뚝 서서 활 쏨을 멈추지 않더니 갑자기 적탄이 눈썹을 치면서 활을 한 아름 당기고 화살을 굳게 잡은 채 돗대에 기대앉듯이 죽으니 노여운 안색은 당당해 살아있을 때와 같았음으로 적선을 쫒아서 수십 리 가고서야 공의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적도 공의 죽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적도 공의 죽음을 모른 채 도망쳐 가기에 우리 배들이 고스란히 돌아 올 수 있었건만 통제사 원균은 사실대로 보고하기 싫어서 다만 “온종일 싸우다 죽다(終日力戰中丸死)라고만 보고하였더라.” 이렇게 시장(諡狀)에 쓰여져 있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너무나도 유명하여 우리 선조의 이 장렬한 전사 애국의 충절을 잘 모르고 있다. 원균이 간단히 “종일 싸우다 죽었다” 고만 보고했는데 모든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지기 마련이어서 공의 장렬한 죽음이 밝혀졌다. 특히 호남의 선비 임준(林竣 선생이 공의 전기를 상세히 썼고, 황명통기(皇明通記 : 명나라 皇室의 기록), 황명존신록(명나라 군사의 종군기록), 만력동정기(명나라 군사기록)에는 그때 정유년 기록에 “왜선 수십 수가 여러 번에 바다를 건너와 부산, 가덕, 안골포에 숨어 있다가 조총을 비 오듯 쏘아 조선군수 안홍국(安弘國)을 죽이고서야 마음 놓고 양산, 웅천(熊川) 등지까지 전장지역을 넓혔다.” 라고 했으니 6~7년 동안 싸움에 우리나라 장병의 죽음을 허다히 보아온 명나라 사람이 특별하게 죽은 충현공(忠顯公) 안홍국의 전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으니 이로써 공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다.

 

 

 4.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청렴한 가문

 

우리 선조님들은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도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였다. 그리고 집안에서의 가난한 생활을 잘 감내하시면서 청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우선 문성공 안향 선조께서 주자학을 도입한 것은 유학을 진흥시켜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한 것이고, 바른 정치를 하려한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 데 있었다. 공이 얼마나 백성을 걱정하고 사랑했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공의 행적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문성공은 감로사(甘露寺)라는 시에서 “서럽구나 백성들은 도탄에서 못 헤어나니 포단(蒲團)에 기대어서 반평생을 허송할 뿐일세.(憂民未得前塗炭 欲向蒲團寄半生)” 라고 읊어 공이 관직에서 반평생을 보내면서도 도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민생을 걱정하는 우민상세(憂民傷世)한 애민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공이 상주판관으로 있을 때이다. 당시 사회는 전화로 인하여 생계를 잃고 불교와 무교(巫敎)의 신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유독히 상주는 일찍부터 무교가 성행하여 합천 지방으로부터 그 곳까지 돌아다니면서 신을 빙자하여 주민을 괴롭히는 무당 세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어느 고을에서도 뒤탈이 겁이 나서 이들을 다스리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바로 그 무당 세 사람을 투옥시켜 그와 같은 요사스러운 일이 없게 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덜어 주었다. 그것도 백성을 사랑하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문간공 안종원 선조는 고려 말 신돈(辛旽)이 정권을 잡고 권세를 부릴 때 유력인사가 “지금 찾아가서 인사를 하면 승진하여 요직에 갈수 있는 기회가 있다.” 고 권했다. 그러나 공은 “나는 원래 등한하고 게을러서 어떤 세력에 붙고 따르는 것은 하지도 못하오. 찾아갈 수가 업소.” 하고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다. 신돈이 정권을 휘두를 때 이러한 말을 한 것만도 큰 용기였다. 결국 강릉부사로 좌천이 되셨다. 공은 원래가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여 올바르게 하시는 성품이라 강릉에 계시는 동안 은혜로운 정책을 펴서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미구에 강릉부사마저도 그만두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강릉의 백성들은 공의 은덕을 잊을 수 없어 살아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당을 짓고 화상을 걸어놓고 흠모했다. 이것이 바로 만고에 예가 드믄 생사당(生祠堂)인 것이다. 공의 애민정신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시조공의 9세인 정숙공 안순 선조는 사헌부에서 사헌잡단(司憲雜端)이라는 자리에 계셨을 때 무고하게 죽게 된 한 궁녀를 살려 주는가 하면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는 꼭 공이 나가서 백성을 규휼했다.

즉, 모함을 받고 갇히어 있는 한 궁녀에 대하여 태조가 사형하도록 대사헌 조박(趙璞)에게 명한바 이때 사헌잡단직에 있던 공은 헌부(憲府)는 형관(刑官)이 아니라는 것과 또 그 죄목을 밝히지 않고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니 조박(趙璞)은 어명이라 하여 강압하면서 사형집행을 독촉했다. 그러나 공은 이를 집행하지 않고 말하기를 “인명이 지중(至重)하고 사불복생(死不復生)이니 급하게 사형에 처함은 의가 아니오. 마땅히 담당부처에 보내어 국문케 하시오” 라고 한즉 조박(趙璞)은 화를 내어 공의 말을 태조에게 그대로 아뢰었다. 태조께서는 바로 깨닫고 그대로 쫓으라 했다. 그래서 그 궁녀는 무죄가 밝혀져 죽음을 면했다. 이러한 일화는 너무나도 많다. 또 1423년 공이 53세 때 함경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많이 유리걸식하게 되었다. 세종께서는 대신 급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구호코자 하였는데 적당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상중(喪中)인데도 불구하고 공을 특히 기용하게 되었고 공이 이때에 효과 있게 잘 백성을 구제하였다.

 

1437년 67세 때에도 충청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생이 심했는데 이때에도 충청도의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시니 이는 공의 투철한 애민사상에 의한 헌신적인 실천으로 이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은 비록 종이라도 질병이나 상사(喪事)가 나면 힘을 기울여 돕는 자비심의 소유자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또한 우리 순흥안씨의 족보를 처음 발간하신 문간공 안현선조께서는 좌의정을 하신 분인데 청백리에 세 번이나 오르셨으니 공께서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면서 청렴한 생활을 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근세에 와서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한 일화는 너무나도 많다. 여기에 한 가지만 소개한다.

선생이 25세인 아주 젊을 때에 일이다. 하루는 샌프란시스코의 가두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상투를 마주잡고 싸우는 광경을 미국인들이 흥미 있게 둘러서서 구경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선생은 즉시 그들의 싸움을 말리면서 그 연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인삼장사를 하는 이 한인 교포들은 협정한 판매지역 을 서로 범(犯)했다는 것이다. 이 한국교포의 싸움을 본 것이 동기가 되어 선생은 재미동포들을 문명한 독립국민 자리에까지 끌어올리는 일에 진력하기로 결심하고 그는 그 날부터 매일 몇 사람씩 호별 방문을 하여 집집마다 마당을 쓸고 변소를 청결히 하며, 창을 닦고 마루를 소재하며, 창가에 커튼을 치고 정원에 꽃을 심는 등 청소와 정돈 미화(美化)에 힘썼다. 처음에는 선생을 모두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그의 정성과 높은 뜻에 깊이 감명 되어 드디어 이에 따랐다.

 

동포들은 어느새 면도를 자주하고 의복에 때가 없도록 하게 되고 담화도 인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하게 되고 이웃사람들이 싫어하는 냄새나 음성이나 모양을 안 보이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포의 생활은 일변하였다. 하루는 샌프란시코의 한 미국인 부호(富豪)가 한국인에게 “당신네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왔소?” 하고 말한 그 미국인은 “당신네 한인들의 생활이 일변 하였소. 위대한 지도자가 없이는 이렇게 될 수가 없소.” 라고 말했다. 그는 안창호라는 사람이 1년 동안 지도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미국인은 그를 만나 보게 되었는데 그는 선생이 백발의 노인이 아니고 새파란 청년임을 알자 더욱 놀랐다. 그 미국인 부호는 그의 공적에 감사하는 뜻을 표하기 위하여 그가 한국인을 지도하는데 사용할 회관하나를 무료로 제공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역시 선조님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엾게 생각하면서 지극히 사랑하여 모두가 함께 동고동락하며 살려는 뜻을 받들어 이렇게 실천한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후손들도 언제나 이러한 뜻을 받들어 모든 사람들이 서로 돕고 서로 잘사는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근면 성실하여 깨끗한 생활을 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5. 숭조목족(崇祖睦族)으로 더욱 번성하는 가문

 

1200년대 말에서 1300년대 초는 우리의 관향지 순흥에서 우리 순흥안씨 집안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양상으로 융성의 길을 시작할 때이며 정말 삼한갑족의 거성(巨姓)으로 자처 할 만큼 대단한 집안이었다. 그리고 이 집안은 어느 집안보다도 화목한 집안이었다. 후에 주세붕 선생이 말 한대로 일가 충효우제 청풍지풍(一家 忠孝友悌 淸風之風)의 집안이었다. 오늘날에는 우리 순흥안씨는 50만에 육박하는데 1파, 2파, 3파를 찾고 또 그 파 중에서도 무슨 파니, 무슨 파니 하는 것을 찾는다. 그러나 당시의 순흥은 한 집안에 불과했다. 그저 먼 친척이 종증조부(從曾祖父) 정도였고 따라서 세연지 쪽에 큰 댁, 대평리 쪽에 둘째 댁, 사현정 쪽에 셋째 댁 모두가 화목하여 서로가 조석으로 왕래하면서 집안의 일을 로 돕고 자제들을 같이 가르치는 등 집안의 번성에 힘썼다.

 

당시 선조들이 문과에 등과한 연대를 기록해보면 문성공 안향 선조께서는 1260년에 문과에 합격하셨고 그 후 그 첫째 아드님이신 문순공 우기(于器) 선조와 조카 되시는 문경공 석(碩) 선조가 1284년에 같이 문과에 합격하셨고 1306년에는 문의공 문개(文凱) 선조께서, 또 그 다음 해인 1307년에는 문정공 축(軸) 선조께서 급제 하셨으며 8년 후인 1315년에는 문성공의 손자 되시는 문숙공 목(牧) 선조께서 급제하셨고, 그 5년 후인 1320년에는 문경공 보(輔) 선조께서 또 1329년경에는 좨주공 집(輯) 선조께서 문과에 급제하는 등 우리 집안은 경사가 겹치게 되었으며 문벌의 집안이면서도 돈목(敦睦)한 집안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충과 효를 근본으로 하여 우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형제간 우애 있고 여러 집안들이 화목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의 영모당(永慕堂) 정규서론(定規緖論)의 맨 첫머리에 보면 “선조의 덕행은 후손들이 본받을 규범이니 그 뜻한 것을 뜻하고 그 배운 것을 배우도록 하라. 만약 그 교훈을 지키지 않으면 잘못되는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先祖德行 後孫之儀範也 志其志 學其學 如或罔遵訓意 則其不免荒墮之責也)” 라고 규정하고 있다.

종규에 대해서는 이에 자세히 설명한 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종규는 명문가의 가풍과 법도를 지키게 하는 규정인 것이다. 순흥안씨의 종규는 7개 항목인데 그 7개 항목이 모두 승조목족에 대한 규정인데 숭조에 관한 규정이 6개 항목이고 목족에 대한 항목은 1개 항목인데 우리 선조님들이 얼마나 돌아가신 조상님에 대한 숭조(崇祖)사업에 중점을 두었는가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숭조에 대한 6개 항목은,

● 제사를 잘 받들라(謹祀).

● 사당을 잘 수리하라(修字).

● 창고를 잘 갖추라(備廩 : 제물, 제기용).

● 선조의 묘에 나무를 무성케 하라(養楸).

● 무덤지기를 잘 보살펴라(恤墓戶).

● 종사 일을 맡기는 사람을 삼가라(愼任司).

이렇게 6개 항목이 되는 이것을 요약하면 묘의 주변에 나무를 심어 선영을 무성케 만들고, 그 묘지기를 잘 보살피며, 또한 제사를 잘 받드는데 그 제수에 쓰이는 곡물이나 제기를 보관하는 창고를 잘 간수하고, 또 사당을 잘 수리해 놓으라는 것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돌아가신 선조님들을 잘 모시라는 뜻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사당이나 또는 창고 등은 별로 해당이 되지 않겠지만 묘소를 잘 관리하고 제사를 잘 받드는 문제는 위의 정신을 본받아 자손 된 도리를 다 해야 할 것이며 더욱 종원으로서 종규를 지켜야할 도의적인 책임이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로 “조상을 잘 받들지 않는 사람으로서 잘된 것을 보지 못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맞는 말이다. 즉, 조상이 없이는 자기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조상에 대해서는 정말 정성을 다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자기 직계의 조상은 물론 방계라 할지라도 모두 한 할아버님 자손이라는 관점에서 종사(宗事)에 대해서는 적극 참여해야 될 것이며 선조를 위한 위선사업에는 자기 힘이 미치는데 까지 협조해야 될 것이다.

특히 우리 순흥안씨의 종사에 대하여 많은 일을 하신 선조님 중에서 크게 존경해야할 선조님들이 많이 계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간행하신 문간공 현(玹) 선조와 또한 관향지 순흥의 시조공과 태사공 부(孚)의 단을 모으시고 제사를 받들게 한 순원군 응창(應昌) 선조를 비롯하여 많은 선조님들이 숭조 위선사업에 힘을 기울이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선조님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뿌리를 알게 되었고 또 우리가 순흥안씨 가문에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1985년부터 시작한 관향지 순흥의 <시조사단이전중건사업>에는 전국의 우리 순흥안씨 5,049명이 성금을 내 주셨고 또 한 많은 종원께서 협조를 해주셨다. 성금은 그 액수가 적게는 2천원 에서부터 크게는 3천만원까지 이렇게 합하여 4억원에 가까운 성금을 내 주심으로서 우리 안문은 350년 내의 숙원이던 시조사단을 이전하고 성역화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단비 12기 그리고 오석 12자 대비인 추원단비 1기 그리고 관리사 1동 주차장 등이 마련되었고 문성공 안향의 향려비, 문의공 안문개의 여향비가 이전되었고 순흥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비봉산에 41,636평의 단소는 우리 순흥안씨의 종산(宗山)이 되었고 또 전답 3,249평이 마련되었음은 오늘에 사는 우리 후손들로서는 큰 숭조사업을 해 냈다는 자부심과 보람을 갖게 된 것이다.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전국의 우리 종원이 이곳의 한 뜰에 모여 시조공을 비롯한 모두 12분 선조님들의 세사(歲祀)를 유교식 전통예법으로 홀기(笏記)에 따라 받드는 것은 그 장소나 인원 2~3천명이 참사하는 규모에 있어 타성의 모범이 됨을 가히 자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조사단의 이전중건사업에 있어 43만 명의 후손 중에서 겨우 5,049명만이 성금을 냈다는 것을 참고로 기억해둘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친족 간에는 목족사업이 더욱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 목족사업에는 모두가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의 종규 7개 항목 중 1개 항목이 목족에 대한 항목인데 이는 이미 설명한대로 친족이 남처럼 되면 안 된다는 것이며 갈래가 다르고 사는 장소가 다르더라도 서로 만나 돈독하고 사랑하는 데 힘쓰고 화목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만나고 서로 도움으로서 옛날부터 안씨는 친족간에 화목하다는 칭찬이 다시 들리도록 하라는 요지인데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만나든 순흥안씨 하면 더욱 반기고 서로 협조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이며 조상을 위한 위선사업(爲先事業)에는 자기 힘이 미치는데 까지 진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순흥안씨 48만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울 때 우리 가문은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 순흥안씨의 번성 발전을 예언한 선인들의 말을 기록해둔다.

 

문장공(文壯公) 둔재(遁齋), 성세창(成世昌) 선생은 “백두산 남쪽에 가장 뛰어난 산을 금강산이라 하고 또 남쪽으로 삼척경계에 이르러 봉우리를 맺음이 하늘에 높이 솟은 것을 태백산이라 하고 다시 남쪽으로 스며들지 아니한 것을 소백산이요 산줄기를 돌고 돌아 골짜기 깊숙하고 또 맑은 시내가 그 옆에 띠처럼 빛나는 것을 죽계라 한다. 그 부여(扶輿 : 아름다운 기운)한 숙기(淑氣 : 따뜻하고 아늑한 기운)가 진실로 모여서 대인군자를 만들어 운을 타고 흥화(興化)하여 사도(斯道)의 명맥이 오래가도록 한 것이니 문성공은 진실로 이 정기를 받아 이곳에 나시었다.” 하시여 우리 순흥안씨의 흥화(興化)를 말하였으며 고려 말의 삼은(三隱)의 한분이신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은 “순흥안씨는 대대로 죽계위에 살았으니 죽계의 근원은 소백산에서 출발하였다. 산의 큼과 물의 맑음과 같이 안씨의 흥함이 무궁하리라(順興安氏世居 竹溪之上 竹溪之源 發於小白 山之大 水之遠 安氏之興 其無窮乎)” 이렇게 말하였다. 즉, 소백산이 큰 것과 같이 또 죽계천이 맑게 쉴 새 없이 흐르는 것과 같이 순흥안씨는 계속 번성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이황(李混) 선생은 “죽계의 여러 안씨가 뻗어났으니 이 산 밑에서 태어나 이름이 중원에까지 떨쳤다(竹溪諸安 毓秀於玆山之下 名振中原)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순흥안씨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또한 선조의 빛나는 유적을 길이 계승해야하는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더욱 자랑스러운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뿌리가 어떻고 가문이 어떻다는 것을 가르쳐야하며 자랑스러운 조상의 부끄럽지 않는 자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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