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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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선조

시호를 받은 선조

 

시호(諡號)라는 것은 주로 공신(功臣), 중신(重臣), 유현(儒賢) 등 그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에 내려준 호(號)인데 이조 때에는 원칙적으로 정2품 이상의 공신과 중신에게 시호를 내리게 된 것이며 이 사시(賜諡)는 최대의 명예의 표창으로서 그 시호 밑에 공자를 붙여 호칭한다. 그런데 이 시호 중에서도 위에 문(文)자가 붙는 시호를 제1로 친다.

 

아래를 클릭하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문(文) 자 시호를 받은 선조

2) 문외(文外) 시호를 받은 선조

 

mark1.jpg1. 문(文) 자 시호를 받은 선조

 

번호

시호(諡號)

휘(諱)

세파(派)

비 고

1

문성공(文成公)

향(珦)

4세 1파

 

2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

5세 1파

 

3

문의공(文懿公)

문개(文凱)

5세 2파

 

4

문경공(文敬公)

석(碩)

5세 3파

 

5

문숙공(文淑公)

목(牧)

6세 1파

 

6

문정공(文貞公)

축(軸)

6세 3파

 

7

문경공(文敬公)

보(輔)

6세 3파

 

8

문혜공(文惠公)

원숭(元崇)

7세 1파

 

9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

7세 1파

 

10

문렬공(文烈公)

원린(元璘)

7세 1파

 

11

문간공(文簡公)

종원(宗源)

7세 3파

 

12

문정공(文靖公)

면(勉)

8세 1파

 

13

문충공(文忠公)

우(祐)

8세 1파

 

14

문숙공(文肅公)

숭선(崇善)

10세 3파

 

15

문정공(文靖公)

지(止)

12세 1파

 

16

문희공(文僖公)

위(瑋)

14세 1파

 

17

문간공(文簡公)

현(玹)

14세 1파

 

18

문강공(文康公)

방준(邦俊)

17세 1파

 

 

 

이상 18분 선조에 대한 한 분 한 분을 간략하게 그 행적을 다음에 기술한다. 다만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 선조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1)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동방 도학지조로 백세의 유종이며 동국 18현 중 한 분

시조공 안자미(安子美)의 4세 되는 문성공 안향은 우리 순흥안씨를 명문의 가문으로 일으킨 가장 훌륭한 선조이다. 공은 1243년 순흥의 학다리(鶴橋), 지금의 속칭 안터(현 시조사단 건너편)에서 태어났다.

1260년(고려 원종 1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랑을 거쳐 1275년 상주판관을 지냈고, 그 후 국자사업 교수를 거쳐 1288년 좌승지(비서관)가 되었다. 다음 유학제거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직접 베껴 가지고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 전파했다.

 

그후 밀직사사(密直司事), 삼사좌사(三司左事) 등 관직을 역임하였고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계림부윤(鷄林府尹),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고 1304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었다.

 

공은 문교의 진흥을 위하여 육영재단인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했으며 국학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제기, 악기와 육경, 제자(諸子) 등의 서적을 비치했다. 이로써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추앙받게 되었고, 벼슬은 도첨의중찬(내각수반격)에 이르렀고, 문묘(文廟)에 동방 18현인(賢人)의 1인으로 배향되었으며 소수서원과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 등 14개 서원과 전국의 361개의 향교(鄕校)에 배향되었다.

 

공은 1306년(충렬왕 32년) 9월 12일에 돌아가니 춘추가 64세였다. 시호는 도덕박문(道德博聞)이 문(文)이요, 안민입정(安民立政)이 성(成)이라 하여 문성공이며,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모셔있고 경기도 의왕시 안자묘(安子廟)에 위패를 모시고 있다.

 

 2) 문순공(文順公) 안우기(安于器)

1만 8백 권의 경적(經籍)을 검열한 도학의 승계자

문순공 안우기는 문성공 안향의 아들로 자는 허중(虛中), 호는 죽옥(竹屋)이다. 문순공은 일찍이 아버님의 학업을 이어받아 학문에 능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공은 1284년(충렬왕 8년) 18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국학좨주(정3품), 밀직부사 등을 거쳐 1314년(충숙왕 1년) 지밀직으로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만 8백 권을 검열했다.

 

1316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검교찬성사, 판전의시사, 상호군에 오르고 1329년 65세로 돌아가시니 근학호문(勤學好問)하시어 문(文)이요, 자화편복(慈和偏服)하시어 순(順)이라 하여 문순공(文順公)의 시호를 받았다. 묘소는 문성공 묘 옆에 있으며 마산시 합성1동에는 문순공 죽옥 안선생 합포 유적비 [ 두 부자가 따로 경상도 지금의 마산인 합포에 진수(鎭守)하며 군민을 잘 돌보고 청렴하게 일 처리를 잘 했다고 비를 세움.]가 서 있다.

 

 3) 문의공(文懿公) 안문개(安文凱)

충절의 공신 일대의 유종(儒宗)인 순흥부원군

공은 시조공의 5세로서 초휘는 균(鈞)이요, 자는 국평(國平)이며, 호는 질재(質齋), 시호는 문의공(文懿公)이다. 1306년(충렬왕 3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으로 보임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사의(右司議)로 있을 때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당시 원나라 심양왕(瀋陽王)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고려 왕족에게 수여한 봉작 가운데 하나로 심양지역의 고려인을 다스리며 고려왕권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심양왕, 심왕으로도 부른다.]이 충숙왕을 헐뜯어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었는데 공은 국왕을 모시고 대언(代言)으로서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의를 다하여 충성을 바쳐 국왕을 위하여 원통하고 억울하다는 상서를 올려 왕을 보좌하였고, 다음 임술년에 왕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공은 또 대언으로 진현관(進賢館) 제학(提學)을 겸하였다.

 

또 지삼사사(知三司事)를 겸하여 왕이 억울하게 부당한 누명을 쓰고 엄중한 문책을 당하자 공은 충성을 다하여 무고임을 밝혀 끝까지 그 시비를 가려 소명을 다하였다. 이로 인하여 공은 얼마동안 종정부(宗正府)에 갇혀 있었고 몇 년 후 누명을 벗게 되고 풀려서 세상이 바로 잡히자 왕이 1325년(을축년)에 고국에 돌아오시니 공에게 문개(文凱)라는 새 이름을 내리고 동한보절진충무극공신(東韓保節盡忠無極功臣)으로 녹훈되었다.

 

그리고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영효사관사, 순흥부원군, 삼중대광좌정승(三重大匡左政丞), 그후 우문관대제학(右文舘大提學)이 되었고, 1333년에는 공이 예위선시(禮圍選試)를 관장하니 공의 문하에서 영재준걸이 많이 나와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상국은 일대유종(一代儒宗)이라고 했다.

 

그후 왕이 세자에게 전위하여 세자가 왕위에 올라 다시 가작하였고 그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 공은 66세에 돌아가셨고 문의공(文懿公)으로 시호를 받게 되었다. 묘소는 실전되어 순흥의 추원단에 모셨다.

 

 4)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

아드님 3형제가 모두 문자 시호를 받았다

문숙공 안목은 문성공의 손자로서 시조공의 6세이다. 공은 문순공 안우기의 장자로 태어났다.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며 시호는 문숙공(文淑公)이다. 1315년(충숙왕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판전교시사를 지내다가 충목왕 때 밀직제학에 이르게 되고 공정한 정사로 어려운 백성을 많이 구했으며 시와 거문고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1348년(충목왕 4년)에 경사도감제조(經史都監提調)가 되고 공민왕 때는 밀직부사 등을 거쳐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舘大提學)을 역임함으로써 순흥군(順興君)에 피봉되었고, 만년에는 파주 서부에 살다가 별세하였다.

시호는 근학호문(勤學好問)함이 문(文)이요, 도덕순일(道德純一)함이 숙(淑)이라 문숙공(文淑公)이다. 문숙공은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자 시호를 받았으니 문혜공 원숭(文惠公 元崇), 문혜공 원형(文惠公 元衡), 문렬공 원린(文烈公 元璘) 세 분이다.

 

문숙공의 묘소는 이북에 있고 문숙공은 1822년 순흥 용연사(龍淵祠)에 배향되었다. 문성공 이하 4대에 걸쳐 문자 시호를 받은 분이 여섯 분이나 되니 정말 문벌의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5)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

삼조 실록을 편찬하고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남긴 흥녕부원군

문정공은 자는 당지(當之)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며 시조공의 6세이셨다. 1307년(충숙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1324년에는 원조 제과(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치니 원조(元朝)에서는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으로 임명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국 후 악정을 거쳐 1330년 우사의대부로 강원도를 존무(存撫)할 때 양양 통천에 향교를 창건하였고 이 무렵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지었다.

 

그 후 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을 거쳐 1343년에는 상주목사(尙州牧使), 1344년에는 밀직부사, 정당문학, 영춘추관사(領春秋舘事)를 역임하였고, 1346년에는 충렬, 충숙, 충선의 삼조실록(三朝實錄)을 수찬(修撰)하였다. 그 후 대중대광도첨의찬성사(大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제수받고 흥녕부원군에 피봉되었다. 67세로 돌아가시니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장단군 대덕산에 모셨고 1544년 소수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장단의 봉잠서원 외 전국의 유명 사원에 배향되었다.

 

특히 공은 상주목사로 있을 때 어머님에 대한 효도가 지극했고 또 두 아우(안보, 안집)를 잘 돌보고 다스려 가도를 세웠다. 또한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순흥을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겼고 많은 시도 남겨 근재집(謹齋集)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6)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왕실의 미신까지 배척한 청렴한 효자

문경공(安輔)은 시조공의 6세로서 자는 원지(員之)이며 1320년(충숙왕 경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주사록, 편수관 등을 역임했다.

 

1345년(충목왕 1년)에 원나라 제과(과거)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도서전적 관리)로 있다가 늙으신 어머님의 봉양을 위하여 귀국하여 전법판서, 양광도안렴사, 교주도안렴사, 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일은 1355년 공민왕 4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라는 시험관이 되어 안을기 등 33명을 뽑은 일이다. 이 무렵 공민왕께서 오늘은 음양으로 어떤 날인가 알아보도록 명한 바 창귀일 즉 귀신이 날뛰는 날이란 보고를 듣고 행사를 중지하도록 명했다. 이때 문경공 안보께서는 음양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왕자가 천시를 받드는 것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신다면귀신이 어찌 해하겠습니까” 하니 왕의 얼굴빛이 달라졌다는 고사가 있다. 문성공 안향께서도 미신타파와 사도배척(邪道排斥)에 앞장섰는데 공은 궁중에서까지 그 뿌리 깊은 미신을 서슴지 않고 없애버렸던 것이다.

 

불행히도 공께서는 자녀가 없었다. 공은 “나는 아들이 없지만 문생들이 바로 내 아들이야.”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하며, 문생 이보림(李寶林)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염국보와 이인과 우현보는 다 추밀재상(樞密宰相)으로 봉익대부(奉翊大夫)였고, 부도를 배척하고 오도를 붙들은 정습인, 구원을 피하여 황야에 둔거한 둔촌 이원령, 이 외에도 제자로서 세상에 이름 높은 인사가 많았다.

 

그리고 공의 효심은 놀라왔다. 어머님이 늙으셨으나 돌아가 봉양치 않으면 불효라 생각하여 원나라에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고, 또 어머님이 노쇠하자 관직을 사퇴코자 했으나 불허되고 계림부윤으로 벼슬을 바꿨다.

 

그 후 향부(鄕府) 가까이에서 노모를 봉양하고 있던 중 자신이 병이 나서 “연로하신 어머님이 계시고 위로 두 형님이 돌아가니 나 또한 이러니 어찌하면 좋으랴.”하고 탄식하시며 슬퍼하였다고 한다.

공이 소수서원에 추배될 때 그 제문에 “문경공 안보께서는 사람들이 다 부정한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했지만 홀로 이에 물들지 않았고 미신을 배척하여 정기가 천지간에 가득하게 하였으며 모은 재산이 없고 청렴결백함이 천하가 주지하는 바라후세에 경모하는 마음이 어찌 없으랴.”라고 공의 인품을 간명하게 표명했다. 56세로 돌아가니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묘소는 순흥에서 실전되어 지금 순흥의 추원단에 단으로 모시고 있다.

 

 7) 문혜공(文惠公) 안원숭(安元崇)

선정을 베풀고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문혜공(文惠公)은 시조공의 7세로서 문숙공〔安牧〕의 장남으로 초휘는 정(靖)이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1341년(충혜왕 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백성들의 생활고가 극심했던 호남지역을 여러 차례 살피고 돌아와서는 그 실정을 왕에게 상주하였다.

 

이에 공은 대언판서로서 전주진영에 배치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보살피고 선친(문숙공 안목)의 교훈과 왕명을 잘 받들어 공적을 올리니 마침내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여 문교정책에 공헌함으로써 순성군(順成君)에 봉하게 되었으나 돌연한 병환으로 별세하니 근학호문(勤學好問) 왈 문(文)이요, 유질자민(柔質慈民) 왈 혜(惠)라 시호를 문혜(文惠)라 하였다. 순흥 용연사에 배향되었다.

 

 8) 문혜공(文惠公) 안원형(安元衡)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지내신 분이다

시조공의 7세로서 문숙공 안목의 차남이며 문혜공(安元崇)의 아우로서 초휘는 원룡이고 자는 경보(敬甫)이며 호는 일호이고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공은 1341년(충혜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사사로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 종2품), 정당문학,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지낸 공신으로서 죽성군(竹城君)에 피봉되어 죽성군파(신 죽산안씨)의 파조가 되었다. 묘소는 전남 담양에 모셨고 1951년 장흥 만수사(萬壽祠)에 배향되었다.

 

 9) 문원공(文元公) 안우세(安遇世)

원종공신으로 호조판서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공의 휘는 우세 자는 보희(輔熙), 호는 후죽계(後竹溪)이다. 1342년 개경에서 태어나 1427년에 별세하니 86세였다. 문성공의 현손으로 고려조 현종 때 급제하였고 판전리사를 거쳐 조선조 이태조를 도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고 묘지(墓誌)에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의 기록이 있으며 문원(文元)이라 시호를 받았다.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배위는 서원 염씨이다.

 

공은 조선 태조의 원종공신으로 태조가 함흥에 거둥하였을 때 대호군으로 호송하였고 태종 2년 동북모반사건을 고하여 정난3등공신이 되었으며 성품이 충성스럽고 정의로우며 굳세어 모든 일을 신중히 판단하고 진퇴가 분명하였다.

문원공이 서산 지곡에 낙향하여 사시다 돌아가시고 묘지가 실전되어 안타까울 때 묘지석을 발견하여 신도비를 세웠다.

 

10) 문열공(文烈公) 안원린(安元璘)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를 지내고 탐진군으로 봉해진 분이다

공은 문숙공(安牧)의 셋째 아들로서 초휘는 원륜(元崙)이다. 1341년(충혜왕 2년)에 백씨와 중씨와 함께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이 누진되어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를 지내고 탐진군(耽津君)으로 봉해지고 탐진군파(탐진안씨)의 파조가 되었다. 시호는 근학호문(勤學好問)함이 문(文)이요, 충군자민(忠君慈民)하여 열(烈)이라 하였다. 묘소는 실전되어 전주시 삼천동에 단을 모셨다.

 

11)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

선정으로 만고에 드문 생사당(生祠堂)의 주인공이 된 흥녕부원군

공은 시조공(안자미)의 7세로서 문정공(安軸)의 아들이며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1341년(충혜왕 3년)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예문춘추관, 검열, 수찬 등을 역임하고 1347년 도사(都事) 등을 거쳐 1351년 전법정랑, 경상도 안렴사, 1364년 강릉지사가 되시어 선정을 베푸니 그후 그곳의 백성들이 만고에 드문 생사당(生祠堂–살아계신 분의 초상화를 모신 사당)을 건립 흠모하였다.

 

1372년 사헌시사(司憲侍史) 등을 거쳐 밀직제학, 1379년에 광정대부, 판숭경부사, 삼중대광, 흥녕부원군, 대사헌, 1388년에는 문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1392년 조선조 건국에 국초 원로가 되어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정1품)로 영삼사사(領三司事), 진현관태학사(進賢舘太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70세를 수하시고 돌아가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리고 배위 광주김씨는 경혜택주(慶惠宅主)로 책정되었다. 묘소는 현재 경북 영주시 단산면 서창리에 있다. 여기서 택주(宅主)라는 것은 여자 분에게 내리는 영예로운 호칭인데 택주는 자기 친정아버지 그리고 시아버지 또 자기 남편이 모두 정1품 이상 즉, 재상 급이면서도 자기의 학문과 행실이 타의 모범이 될 때 내리는 것인데, 경혜택주 다음 대 양도공 배위 영일 정씨도 의정택주로 책정되셨으니 2대에 걸쳐 이러한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한다.

 

12) 문정공(文靖公) 안면(安勉)

시와 서문에 밝았고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대승상을 지낸 분

공은 시조공(안자미)의 8세이며 호는 쌍청당이다. 공은 문간공 김광재 선생에게 수학하여 공민왕 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사간원정언으로 관직에 나아가 판전교시사에서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대승상(政堂文學大丞相)을 지냈다. 그후 흥녕군으로 피봉 되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시와 서문에 밝았다고 한다. 묘소는 실전되어 전남 담양에 단을 모셨다.

 

13) 문충공(文忠公) 안우(安祐)

홍건적(紅巾賊) [홍건적은 몽고족이 한족(漢族)을 누르고 원나라를 세우자 이(異)민족을 물리치고 도탄에 빠진 인생을 살리겠다고 만든 백련교도의 반란군이다. 이들은 살육과 약탈을 일삼고 잔인하였으며 머리에 붉은 띠를 둘렀다.]과 싸워 이를 평정시킨 문무겸전의 구국충신 오성군

 

공은 시조공의 8세로서 문열공안원린의 아들로 일찍이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이 되어 역신 조일신(趙日新)을 주멸하였으며 공민왕 7년에 홍건적(紅巾賊) 모거경(毛居敬)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안주군민만호 부만호가 되어 싸웠다. 홍건적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 정주, 인주를 함락시키고 인주에 웅거하거 늘 부만호 김득배(金得倍) 편장 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이를 쳐 쫓으니 임금이 공에게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세 부족으로 서경(西京)까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다음 해 공민왕 8년 공은 도만호(都萬戶)로 이들과 9번이나 싸워서 이를 격퇴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왕은 공에게 추충절의정란공신 오성군(鰲城君)으로 봉하고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를 제수하였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 20만이 또 압록강을 건너 삭주의 나성에 쳐들어오니 공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이방실을 도지휘사로 삼아 이에 대처하였으나 세 부족으로 곳곳에서 패하고 드디어 개경까지 위태로워졌다.

 

공은 왕이 타처로 행차할 것을 건의하여 왕은 안동 땅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왕은 안동에서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군사를 독려했다. 공민왕 11년에 공과 이방실, 김득배, 황장, 한방신, 이여경, 안우경, 이구수, 최영 등 20만 대군을 이끌고 잃었던 개경을 다시 찾았다.

 

이때 이성계(李成桂)는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로 큰 공을 세웠고 이로써 수차에 걸친 홍건적의 대란이 완전 평정되었다. 공은 상주행궁에 있는 공민왕을 알현코자 하였으나 평소 공의 군공(軍功)을 시기하던 역신 상서 김용(金鏞)이 목인길(睦仁吉)을 시켜 왕명을 사칭하여 그의 심복들이 공의 머리를 내려치니 말의 땀이 마르지도 않고 개선하는 노래가 그치지도 않은 가운데 공은 피살되었고 또한 김득배, 이방실도 그들의 손에 죽고 말았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민왕은 공의 어린 아들이 헐벗은 몸으로 길가에 서성임을 전해 듣고 가엾게 생각하여 이를 궁중에 불러두었다가 돌아갈 곳을 물어 보냈다고 한다.

김득배의 문하생 정몽주가 왕에게 상주하여 시체를 거두어 글을 지어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추서했다. 묘는 실전되고 전주시 삼천동에 단비를 세웠다.

 

14) 문숙공(文肅公) 안숭선(安崇善)

세종대왕이 하사한 토지를 받지 않으신 병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공은 시조공의 10세로서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이다. 1411년(태종 11년)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계성전직에 보임된 후 사헌감찰로 계실 무렵 영남 수령들의 비행이 많았을 때 행대(비행감찰)하시어 명성이 높았고 1420년(세종경자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지평 그후 예조정랑, 1424년에 경기감사와 그후한성소윤 등을 거쳐 1429년 상호군이 되었다.

 

그때 공녕군(恭寧君)이 중국의 사신으로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여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으며 이 공로로 세종으로부터 토지 하사가 있었으나 이를 받지 않았다. 그후 부대언, 좌대언, 대독관 1433년에 군정기무처리에 큰 공을 세웠고 1437년에 대사헌 그리고 그후 공조판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형조판서, 지춘추관사를 겸하고 고려사를 편수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때 참소를 당하여 고성(固城)으로 일시 유배된 바도 있다. 얼마 안 있다가 중추원사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고 그후 좌참찬으로 병조판서를 겸하였다.

 

61세로 별세하니 왕께서 슬퍼하고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리고 시호를 문숙이라 했다. 묘는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양도공 묘 아래에 있다. 1454년 문충공 성삼문(成三文)이 신도비명을 찬하였는데 여기에 그 일부를 소개한다.

 

공은 용모와 자태가 영달하시고 소시로부터 호학하여 비록 연편누독(복잡한 글)이라도 한번 보면 기억하고 부영(賦詠)을 잘하여 사람들이 유려하다고 추앙했으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고 붕우를 사귐에 신의 있고 거가에 이(利)를 말하지 않았으며 재회(뇌물)를 문간에 들이지 않으셨으며 어진 이를 예로 대우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포양하심이 천성에서 났으며 집에 거처하여 일을 처리하심이 늠름하시고 추상같으셨으나 사람과 더불어 담소하실 때는 화기가 다사로웠다.…

 

15)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한글로 된 최초의 장편서사 시권제, 정인지, 안지, 박팽년, 신숙주 등이 지었다.]를 짓는 데 참여한 집현전 예문관 대제학

 

공은 시조공의 12세로서 자는 일지(一之)이고 호는 고은(皐隱)이다. 타고난 성품이 매우 아름다우며 유학에 생각이 깊어 매헌 권우(權遇)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다. 시와 문장이 뛰어나고 어질고 선한 업적이 일국에 으뜸이어서 세상 사람으로부터 우러러 존경을 받고 온 백성이 의지한 분이다.

 

1414년 알현친시(謁見親試)에서 장원급제하고 이어 태종 16년에 중시대과(重試大科)에도 급제하여 감찰을 배수 받았다. 세종 조에 공조참판, 호조참판을 거쳐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이어 이조참판, 공조판서를 거쳐 집현전 예문관, 대제학 세자좌부빈객 겸 정당문학 검교좌찬성을 지내면서 1445면 정인지, 권제(權踶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로 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는 데 참여했다. 또 학사 박팽년, 성삼문과 태종실록을 편찬하여 포상을 받았다. 또 왕은 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이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뛰어난 필치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쓴 바 있다. 문종, 단종 양조에는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에 올랐고, 다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관사 성균관사를 역임했다. 1464년 81세로 돌아가니 학문이 깊고 예의와 법도를 높였음에 가로되 문(文)이요, 주공을 본받아 수업하고 유교를 탄탄히 세우니 가로되 정이라 문정(文靖)으로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김제 한절산 사패지(賜牌地)에 모셨고 1793년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배향되었다.

 

16) 문희공(文僖公) 안위(安瑋)

군사전략가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 지중추부사를 지낸 분

공은 시조공(안자미)의 14세로서 자는 백진(伯珍)이며 1521년(중종 신사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서벽관,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총관 지중추부사(정2품)를 역임하였다.

공은 군사전략가로서 오랫동안 병사(兵事)를 관장하고 진(鎭)을 신설하여 변방을 방어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문무를 두루 갖춘 분이었다. 1563년(명종시) 65세로 별세하였다. 시호는 문희이며 공은 전술한 대로 공의 동생 문간공 안현과 더불어 순흥안씨 족보를 처음 간행하였다.

 

17) 문간공(文簡公) 안현(安玹)

순흥안씨 족보를 처음으로 간행하시고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공은 시조공(안자미)의 14세로 문희공(安瑋)의 아우이다. 자는 중진(仲珍)이고 호는 설강(雪江)이다. 1521년(신사)에 형인 문희공〔安瑋〕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고 1548년 한성부 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냈고 1551년 병조판서에 올라 국방의 총책임을 맡았고 1553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1558년 우의정에 이어 관직이 누진되자 의정부 좌의정, 영경연감(領經筵監), 춘추관사(春秋舘事)를 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세 왕조에 걸쳐서 세 번이나 청백리 [삼청동 유래 : 순흥안씨 찬성공파 14세 안현 선조가 중종, 인종, 명종 삼조에 걸쳐 세 번씩 청백리에 올랐다 하여 사시는 곳을 삼청동이라 정하였다고 한다.] [청백리록 : 조선시대 청백리록에 오른 순흥안씨는 3명으로 안현(좌의정), 안잠(安潛 별좌), 안자유(이조판서)가 있다.]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우리 순흥안씨로서 특기할 것은 전술한 대로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백방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우리 순흥안씨의 족보를 백형인 문희공 안위와 처음으로 간행한 분으로서 참으로 어려운 일을 해낸 선조이다.

1560년 60세로 돌아가니 근학호문(勤學好問)하니 문(文)이요, 일덕불해(一德不懈)하여 간(簡)이라 하여 문간(文簡)이라 시호를 내렸다.

 

18) 문강공(文康公) 안방준(安邦俊)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후진교육에 전념한 우산 은봉선생

공은 시조공의 17세로서 자는 사언(士言) 호는 은봉(隱峯)이며 우산(牛山)선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공은 우계 성혼(成渾) 선생에게서 수학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고 전라도 보성 북쪽에 있는 우산에 들어가서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광해군 때의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공의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등용하려 하였으나 모두 거절했다. 또 인조와 효종께서는 수차 벼슬을 내리기 위해 불러들였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나중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동지 수백 명과 함께 국란에 대처하였다. 후에도 장령으로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특승 시켰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1654년 82세를 수하시고 돌아가니 문정공 송준길(宋浚吉)과 문익공 김수흥(金壽興)이 상주하여 이조참판을 추증 받았으며 1813년에는 문충공 김재찬 선생의 상주로 이조판서를 추증받고 또 1822년에는 예조에서 상주하여 시호를 도덕박문(道德博聞)함이 문(文)이요, 연원유통(淵源流通)함이 강(康)이라 문강(文康)으로 내렸다. 묘소는 승주 땅 동북면에 있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찬한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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